베리 (프로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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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리(Berry)는 프랑스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여러 왕과 프랑스 왕족의 출생지이며, 중세 시대에는 베리 공국의 중심지였다. 베리는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 볼드윈 쇼데론의 출생지이며, 14~15세기에 제작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로도 유명하다. 1790년 프랑스 혁명 이후 셰르와 엔드르 두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할되었다. 베리는 비투리게스 부족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세 라틴어 문헌에서는 '비투리아'로 언급되었다. 1360년 공작령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프랑스 왕가의 왕자·공주들이 베리 공작 칭호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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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프로뱅스)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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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베리 공국 |
고유 명칭 | Duché de Berri |
오크어 명칭 | Barric |
라틴어 명칭 | Bituria |
위치 | 프랑스 |
시대 | 근세 |
수도 | 부르주 |
현재 위치 | 프랑스 |
역사 | |
시작 연도 | 1101년 |
종료 이벤트 | 지방 해체 |
종료 연도 | 1791년 |
이전 | 베리 백국 부르주 백국 |
이후 | 셰르 (데파르트망) 앵드르 |
정치 | |
정치 체제 | 프랑스의 지방 |
국왕 | 필리프 1세 (1101년–1108년) |
마지막 국왕 | 루이 16세 (1774년–1790년) |
총독 | 장 3세 드 방돔 (1466년–1482년) |
마지막 총독 |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1760년–1789년)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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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베리는 여러 왕과 프랑스 왕족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 볼드윈 쇼데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에 베리는 베리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4~15세기에 제작된 필사본인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로도 유명하다.[1]
후대에 작가 조르주 상드는 노앙에 있는 베리 영지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상드의 저작물에는 베리의 풍경과 특정한 문화가 많이 등장한다.
공국은 1601년 이후 프랑스 왕가의 고위 구성원이 된 베리 공작/공작 부인이 통치했다. '베리 공작'의 칭호는 이 시기에 영토적 의미를 잃고 왕가의 왕자들에게 수여되었으며, 마지막 공작은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였다.[1]
기원전 750년경에 베리 백작령과 부르주 백작령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843년에 베리 백작령은 국왕이 통치하는 왕령지 또는 왕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878년부터 892년까지 백작령은 오베르뉴 백작령의 일부였지만, 893년에 다시 독립했다. 972년에 부르주 백작령은 '부르주 자작'으로 자작령으로 격하되었고, 1101년에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1360년에 백작령은 베리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221년에 샤토루와 이소든의 영주가 공국에 병합되었다.[1][3]
1698년 3월 14일에 아드리앙 모리스 드 노아이유, 노아이유 공작이 19세의 나이로 군사 총독으로 임명된 것이 이 지방의 첫 총독으로 보인다.[3]
1778년 루이 16세는 베리 지방 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지방으로 의회를 확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베리의 특권 계층의 반대에 직면한 후 이 아이디어를 포기했다.[2]
1790년에 이전 지방이 해체되었을 때 베리 공국은 두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할되었다. 즉, 상부 (동부) 베리의 셰르와 하부 (서부) 베리의 엔드르이다. 일부 코뮌은 알리에, 크뢰즈, 루아레, 루아르에셰르 데파르트망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1]
베리(Berry)의 이름은 수도인 부르주(Bourges)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 군대가 갈리아를 정복하기 전 이 지역에 정착한 비투리게스 부족[4]에서 유래되었다. 이 부족의 이름은 지역의 이름이 되었으며, 중세 라틴어 문헌에서는 종종 ''비투리아''(Bituria)로 언급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독립된 백작 영지였다. 11세기 말에는 프랑스 왕가가 점령했으나, 완전히 프랑스에 귀속된 것은 그로부터 2세기나 지난 후였다.
베리는 1360년에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장 2세가 아들인 베리 공작 장 1세 (장 드 베리, 1340년 - 1416년)에게 친왕 봉토로 위임했기 때문이다 (장 1세는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의 제작을 명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작령은 1434년에 프랑스 왕령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작가의 직계가 끊어질 때, 이를 예상한 당시 당주가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고 자신의 (공작가의 혈통을 잇지 않은) 자녀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꾀했기 때문이다.
베리 공작의 칭호는 이후 프랑스 왕가의 왕자·공주들이 계승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은 샤를 10세의 차남으로 1820년에 암살된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이다.
2. 1. 고대와 중세
베리는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 볼드윈 쇼데론의 출생지이다. 중세 시대에 베리는 베리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4~15세기에 제작된 필사본인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로도 유명하다. 베리의 이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 군대가 갈리아를 정복하기 전 이 지역에 정착한 비투리게스 부족[4]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세 라틴어 문헌에서는 ''비투리아''(Bituria)로 언급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독립된 백작 영지였다. 기원전 750년경에 베리 백작령과 부르주 백작령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843년에 베리 백작령은 국왕이 통치하는 왕령지 또는 왕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878년부터 892년까지 백작령은 오베르뉴 백작령의 일부였지만, 893년에 다시 독립했다. 972년에 부르주 백작령은 '부르주 자작'으로 자작령으로 격하되었고, 1101년에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11세기 말에는 프랑스 왕가가 점령했으나, 완전히 프랑스에 귀속된 것은 그로부터 2세기나 지난 후였다.
1360년에 백작령은 베리 공국으로 승격되었다.[1][3] 선왕 장 2세가 아들인 베리 공작 장 1세 (장 드 베리, 1340년 - 1416년)에게 친왕 봉토로 위임했기 때문이다. 1221년에 샤토루와 이소든의 영주가 공국에 병합되었다.[1][3] 이 공작령은 1434년에 프랑스 왕령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작가의 직계가 끊어질 때, 이를 예상한 당시 당주가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고 자신의 (공작가의 혈통을 잇지 않은) 자녀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꾀했기 때문이다.
2. 2. 베리 공작령
베리는 여러 왕과 프랑스 왕족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 볼드윈 쇼데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에 베리는 베리 공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4~15세기에 제작된 필사본인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로도 유명하다.[1]
공국은 1601년 이후 프랑스 왕가의 고위 구성원이 된 베리 공작/공작 부인이 통치했다. '베리 공작'의 칭호는 이 시기에 영토적 의미를 잃고 왕가의 왕자들에게 수여되었으며, 마지막 공작은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였다.[1]
기원전 750년경에 베리 백작령과 부르주 백작령이 프랑크 왕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843년에 베리 백작령은 국왕이 통치하는 왕령지 또는 왕실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878년부터 892년까지 백작령은 오베르뉴 백작령의 일부였지만, 893년에 다시 독립했다. 972년에 부르주 백작령은 '부르주 자작'으로 자작령으로 격하되었고, 1101년에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1360년에 백작령은 베리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221년에 샤토루와 이소든의 영주가 공국에 병합되었다.[1][3]
1698년 3월 14일에 아드리앙 모리스 드 노아이유, 노아이유 공작이 19세의 나이로 군사 총독으로 임명된 것이 이 지방의 첫 총독으로 보인다.[3]
1778년 루이 16세는 베리 지방 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지방으로 의회를 확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베리의 특권 계층의 반대에 직면한 후 이 아이디어를 포기했다.[2]
1790년에 이전 지방이 해체되었을 때 베리 공국은 셰르와 엔드르 두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할되었다. 일부 코뮌은 알리에, 크뢰즈, 루아레, 루아르에셰르 데파르트망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1]
1360년 10월, '베리 공작' 작위는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그의 셋째 아들인 푸아티에의 장을 위해 만들었다. 이 공작의 뒤를 이어 왕족의 여러 구성원들이 이 작위를 물려받았으며, 공작이 발루아 왕가의 구성원이라는 전통을 확립했다. 그러나 1505년 마지막 베리 여공작 잔 드 프랑스가 자연사하면서 이 작위는 왕실 영지로 통합되었다. 1527년, 이 작위는 나바르의 마르그리트를 위해 다시 만들어졌지만, 로렌의 루이즈 여공작이 사망한 1601년에 다시 해산되었다.
1686년, 루이 14세는 그의 셋째 손자 샤를 드 부르봉을 위해 이 작위를 다시 만들었지만, 1714년 공작의 사망으로 인해 작위는 해산되었다. 1754년, 루이 15세는 그의 손자 루이-오귀스트 드 부르봉 (후에 루이 16세)을 위해 이 작위를 다시 만들었으며, 그는 도팽이 된 1765년에 이 작위를 포기했다. 1778년, 루이 16세는 그의 조카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난드를 위해 이 작위를 다시 만들었다. 1820년 마지막 공작이 암살당하면서 이 작위는 다시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
베리가 지방이었던 동안, 베리 공작은 해당 지역의 법적 지도자였다. 다음은 역대 공작들이다.
문장 | 초상화 | 이름 | 다른 작위 | 재임 기간 |
---|---|---|---|---|
![]() | 샤를 드 부르봉 | 1686년 7월 31일 1714년 5월 5일 | ||
![]() | 루이-오귀스트 드 부르봉 | 1765년 8월 23일 1765년 12월 20일 | ||
![]() | 샤를 페르디난드 다르투아 | 1778년 1월 24일 1820년 2월 14일 |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독립된 백작 영지였다. 11세기 말에는 프랑스 왕가가 점령했으나, 완전히 프랑스에 귀속된 것은 그로부터 2세기나 지난 후였다.
베리는 1360년에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장 2세가 아들인 베리 공작 장 1세 (장 드 베리, 1340년 - 1416년)에게 친왕 봉토로 위임했기 때문이다 (장 1세는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의 제작을 명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작령은 1434년에 프랑스 왕령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작가의 직계가 끊어질 때, 이를 예상한 당시 당주가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고 자신의 (공작가의 혈통을 잇지 않은) 자녀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꾀했기 때문이다.
2. 3. 근대
베리는 여러 왕과 프랑스 왕족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제1차 십자군에 참전한 기사 볼드윈 쇼데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1] 후대에 작가 조르주 상드는 노앙에 있는 베리 영지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상드의 저작물에는 베리의 풍경과 특정한 문화가 많이 등장한다.공국은 1601년 이후 프랑스 왕가의 고위 구성원이 된 베리 공작/공작 부인이 통치했다. '베리 공작'의 칭호는 이 시기에 영토적 의미를 잃고 왕가의 왕자들에게 수여되었으며, 마지막 공작은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였다.[1]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독립된 백작 영지였다. 11세기 말에는 프랑스 왕가가 점령했으나, 완전히 프랑스에 귀속된 것은 그로부터 2세기나 지난 후였다. 베리는 1360년에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장 2세가 아들인 베리 공작 장 1세 (장 드 베리, 1340년 - 1416년)에게 친왕 봉토로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 공작령은 1434년에 프랑스 왕령으로 다시 돌아갔다. 공작가의 직계가 끊어질 때, 이를 예상한 당시 당주가 영지를 몰수당하지 않고 자신의 (공작가의 혈통을 잇지 않은) 자녀에게 영지를 물려주려고 꾀했기 때문이다.
베리 공작의 칭호는 이후 프랑스 왕가의 왕자·공주들이 계승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은 샤를 10세의 차남으로 1820년에 암살된 샤를 페르디낭 다르투아이다.
1778년 루이 16세는 베리 지방 의회를 소집하고 다른 지방으로 의회를 확대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베리의 특권 계층의 반대에 직면한 후 이 아이디어를 포기했다.[2] 1790년에 이전 지방이 해체되었을 때 베리 공국은 셰르와 엔드르 두 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분할되었다. 일부 코뮌은 알리에, 크뢰즈, 루아레, 루아르에셰르 데파르트망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1]
3. 지리
3. 1. 브렌(Brenne)
앵드르 주의 샤토루 서부와 투르농생마르탱의 동부에 위치한 브렌은 옛 베리 지역과 투렌에 걸쳐 있던 지역이며, 현재는 8세기 이래로 이 지역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어업을 위해 만든 많은 연못들로 인해 브렌 자연 보호 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브렌(Brenne)은 앵드르주에 위치하며, 샤토루 서쪽, 투르농-생 마르탱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옛 베리와 투렌 지역에 걸쳐 있던 곳으로, 현재는 보호 자연 구역(브렌 지역 자연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은 8세기부터 지역 수도원 수도사들이 어업을 위해 조성한 수많은 연못 때문에 '천 개의 연못의 땅(Pays des mille étangs)'이라고도 불린다.4. 문화
참조
[1]
EB1911
[2]
서적
The Great French Revolution, 1789-1793
http://www.revoltlib[...]
New York: Vanguard Printings
[3]
웹사이트
Provinces of France to 1791
https://www.worldsta[...]
2022-10-21
[4]
서적
L'Europe et ses Populations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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